잡다한 풍경과 여행이야기

내 눈 앞의 그리움...

달무릇. 2024. 2. 18. 11:50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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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그리움은 늘 눈 앞에 있다.

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

 언제라도 어느 곳이든 지

손으로 더듬으며 만질 수 있다.

그럼에도 늘 그립다.

 

그것이 고향이다.

내 아버지 

자라면서 한 번도 무등에 태워 나를 데리고 다닌 적은 없다.

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아프기라도 하면

무엇엔가 홀린 듯 깜짝 놀란 듯

정신없이 나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데려 가 주신 아버지.

 

그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땐 어머니가  그렇게 해 주셨고

밤이 깊도록 시름을 놓지 못했던 작은 방 안의  한 숨이

여전히 남아 있는 곳.

 

고향.

십년 사이 강산도 변하고

육 십년 동안 바다가 육지로 변하고

그 땅에 수 십 층짜리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늘어졌건만 

도심 한가운데 있는 내 고향은 여전히 옛모습 그대로다.

 

그래서 더욱 더 그립고  안쓰럽다.

 

그 것이 내가 좀 더 자주 고향으로 발길을 향하는

탓이기도 하다.

무릇 고향이라면 정답고 아늑하고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기만

하여야 할 터 인데.

 

어쩌다가 내가 품어 주어야만 할 존재처럼 쇠락한 채

길가는 나그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

발길 한 번 닿지 않는 곳으로 변했는 지.

 

한 때는 그 곳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가득했던

시장통 이기도 했지 않은가.

 

어쩜 그 안쓰러움이 더욱 더 내 발길을 고향으로 끌어 당기고

있느지도 모르겠다.

마치 작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

남부민 마을과 감내 산마을 같다.

먼 데서 보는 겉모양은 두 마을이 하나도 다르게 보이지 않건마는

조금만 발길을 당겨서 가 보면 

 

한마을은 점점 더 비어 가고 공허해 지지만

다른 한 마을은 감천 문화마을이란 새옷으로 갈아 입고

점점 더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외지인의 발길로 분주 하다.

 

물론 좀 더 자세히 안을 들여다 보면 감천 문화마을 역시

오래고 긴 세월 동안 힘든 시절을 겪은만큼 여기 저기 상채기가 많고

때문에 꽤 많은 집들이 비어 있다.

 

그러나 많은 상처를 입었던  깊은 골목의 그 빈집들이 차츰

새옷으로 갈아 입고 새 색깔로 채워 지고 있다.

이 모양은 마치

얼마전 까지만 해도 폐 어선들로 가득한 포구의 한 구석에 쓸모없이 휑하게 서 있던

낡고 오래된 공구 창고나 선박용 자재 창고들을 보는 듯 하다.

 

 

포구 한 쪽의 철공소나 공구 창고는 근근히 옛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에

다른 한 곳은 옛모습을 그대로 고이 간직한 채 멋진 카페나 식당으로 

그 모습을 바꾸어 주위 이웃은 물론이고 먼 데 관광객들까지 끌어 모으고 있다.

마찬 가지 였다.

안타깝게도 예전에는 좀 더 도시적이고 번화했던 내 고향 동네는

쇠락할 데로 쇠락하여 관광객은 말을 할 것도 없고

오가는 나그네 조차 그 발길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.

 

반면에 바로 이웃 동네인 바닷가 언덕 마을은 

당시에도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며 살았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힘들게

살아 가던 동네였다.

 

그래도  당시 유일하게 아파트가 들어선 동네이기도 했다.

영선 아파트.

1960년대 중.후반에 입주를 시작했으니 벌써 오십년도 훌쩍 넘었다.

그 당시에는 요즈음 누드 분양이라고 새로운 트랜드로 부상하고 있는

뼈대만 설치된 그런 아파트 였다.

 

난방은 말을 할 것도 없고

각 방의 바닥조차 시멘트 대신 연탄재로 입주민이 스스로 채워넣던 시절 이었다.

 

지금은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 두 어 세대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.

나머지 세대는 모두 떠나고 없는.

 

그런데 기이 하게도 언제 무너질 지도 모르던  길 건너 편에 있는 언덕배기 판잣집들은 

영화 .'변호사'의 촬영지가 된 이후로 급격히 관광지로 변모 하였다.

관광지가 된 이후로는 원래 살던 주민들은 삶의 터를  떠나고 말았다.

대신 외지인들이  그 집들을 사들여  바다가 잘 보이는 풍경을 이용하여 

카페로 우후죽순 개업을  하고 말았다.

지금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은  거의 한 집 건너 카페가 되고 말았다.

그것도 처음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각자의 개성을 살려

미술과 공예 작품들을 창작하는  문화마을을 형성하며  흰여울 문화마을이라는이름을 갖게 되었다.

흰여울 .

흰여울이란  원래 봉래산(고갈산) 기슭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마치 눈이 내리는 모습과 비슷하다

하여 근래에 지어진 이름 이기도 하다.

 

그런데 어느 사이 그 청년 예술가들도  주변에 카페들이 들어서자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더니

이제는 아예  그 또한 모두 사라져 버렸다.

문화마을이라는 이름만 남겨둔 채.

 

그런데도 내게는 늘 정겹다.

마치 어릴적  어머니의 품속처럼

여전히.

 

수몰지의 원주민들이 물에잠긴 고향마을을 늘 그리워 하듯

그립다.

 

그들이 조상의 혼을 모시고 살던 뽕나무 가득한 마을이 

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었다 한들  그들 마음 속엔 

늘 고향이 살아 숨쉬고 있듯이

 

나 또한 손바닥 위의 고향이 늘 그립다.

고향이 그리운만큼 옛동무들도 그립고. 

집에 오느 길.

옛날 어마님의 손 맛이 그리워 들린 한식당.

입 맛은 그 어느 하나 어머니 손맛 닮은 게 없지만

모양만은 그럴싸 해 그나마 위안이 된다.